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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bebell의 다른 이야기들.

이연주 변호사라고... 검찰을 떠난 이의 얘기인데
먹먹할 정도의 답답함이 느껴진다.

​​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

내가 검사로 임관한지 5개월쯤 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17세의 가출소녀가 절도죄로 구속된 사건이 나에게 배당되었다. 그 전날 당직검사가 구속시킨 모양이었는데, 그 소녀는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였고 게다가 임신한 상태였다.

노숙을 하는 그 아이는 따뜻한 밥 한끼와 잠자리를 준다는 약속이면 누구든지 따라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세상을 글로 배웠고, 피의자에 대한 태도로 배운 것은 사법연수원 검찰실무 교재의 여러 결정문 예에 나와 있는 “피의자의 장래를 엄히 훈계하고”가 다였다. 내가 어리석다지만, 배고픔과 추위를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는 그 아이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훈계를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나는 그 아이에게 왜 집을 나왔는지, 지금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가 그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이상 그 아이의 가망없는 상황을 내 걱정의 리스트에 더하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마음에서였다.

글로 배우지 못한 상황은 그 외에도 많았다.

검사장은 자신의 관사 주소를 적어주며 나에게 그 곳으로 퇴근 후 찾아오라고 하거나 단둘이 등산을 가자고 했고, 일요일날 호텔 일식당에서 식사를 하자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차장 검사는 자신의 방에 불러서 특정사건의 기소유예를 지시하는 자리에서 그 사건의 청탁을 하는 스폰서와 전화통화를 했다. “네 제가 지금 불러서 잘 시켜두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요”라고.

부장검사는 점심식사 자리에서 한때 나이트클럽의 사장이 소개시켜준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와 함께 통영여행을 간 이야기를 했다. 지역유지로부터 호화요트를 빌려서 다녀온 여행이라고 했다. 그 요트 위에서 자신이 오일을 발라주던 아가씨의 탄력있고 날씬한 몸과 매끄러운 피부에 대해서 상세히도 묘사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부장검사는 또 내가 구속하라고 지시를 내린 사건의 기록이 부장실로 올라갔을 때 내가 서명날인한 지휘명령서 부분을 없애고 자신이 만든 “불구속” 지시로 바꾸었다. 그런 다음 나를 전화로 불러 서명, 날인을 하고 가라고 지시했다. 그 사건은 고위공직자의 동생이 저지른 음주뺑소니 사건이었고, 음주운전적발이 3회째였다. 삼진아웃제에 따라 음주운전만으로도 구속되는 게 원칙이었는데, 거기에 더하여 인명사고 후 도주까지 한 피의자에 대하여 부장은 불구속결정을 했다.

검사장, 차장검사, 부장검사는 모두 타인을 처벌하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다. 법률의 적용과 집행은 외부를 향한 것이지, 그들은 거기에서 제외되고 법을 벗어나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는 우울감에 시달렸고 출근하는 것이 두려웠다. 현실을 생각하고 느끼면 혼란스럽고 불안해져 마치 내가 딛고 있던 땅이 조금씩 침식되어 깎여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지 않고 느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나는 뿌리로부터 물과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는 고목처럼 안으로부터 메말라갔고 현실을 살아가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마치 내 영혼이 공중 어딘가를 부유하며 허깨비로 살아가는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검찰을 떠났고 시간은 흘러 김홍영 검사가 자살을 했다. 나보다 몇배는 더 고통스럽고 더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었을 것을 짐작하고 가슴이 아렸다. 위의 검사장, 차장검사, 부장검사는 검사장으로 승진하고 서울중앙지검 검사장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었다. 나에게는 세상을 욕할 자격이 없었다. 나에게 침묵의 죄를 물어야 할 뿐.

그런데 나에게 더 깊은 절망은 그 후에 찾아왔다. 공익의 개념이라고는 전혀 없는 욕망덩어리의 천박한 권력자에게 부역한 혐의를 받고 있던 검찰이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을 때이다.

검사들은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항변했다. 검사가 쓴, 베스트셀러가 된 어느 책에서 그 검사는 “내가 검찰에 들어온 뒤 이 조직은 늘 추문과 사고에 휩싸였다. 그때마다 뼈를 깎는 각오로 일신하겠다는 발표를 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더 이상 깎을 뼈도 없는 연체동물이 된 것 같았다. 그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늘 죄인처럼 지냈지만, 추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대부분의 검사들이 왜 싸잡아서 욕을 먹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고 적었다. 저 검사는 침묵한 죄와 행동하지 않은 죄를 각성하지 못하고 저렇게 가볍게 보는구나 싶었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법원에 접수시킨 압수수색영장을 변호사의 영장기각 청탁을 받고 법원으로부터 회수하고서는 보관본의 차장 날인을 수정액으로 지운 다음 결재 중이었는데 직원이 실수로 접수시켰다는 거짓말을 하고, 국회의원의 채용청탁비리를 봐주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다.

죄의 무게를 다는 그들의 저울은 고장났다. 17세의 가출소녀를 구속하고 자신의 스폰서와 고위공직자의 동생은 봐주던 그들은 자신들의 범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마음이 시리고 아팠다. 몸을 부르르 떨면서 그들에게 사람을 심판할 자격이 있는지,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처벌하게 하는 게 옳은지를 아프게 나에게 물었다.

#검찰개혁#검찰비리#이연주

Posted by tubebell

나는 서브웨이 촌놈(?)이라 잘 모르겠는데...
저런 다양한 조합이 다 검증이 된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ㅋㅋㅋㅋ

다만, 서브웨이 갈 때마다
몇 개는 한 번 시도해 봐야겠다.

Posted by tubebell

드웨인 존슨의 이야기.

이런 거 보면 어릴 적에 사고 좀 쳐 봐야
더 멋진 사람이 되는 듯?! ㅋㅋㅋㅋ

Posted by tubebell

우리가 “보편적 복지”를 항상 얘기하는 이유.
남이 없이 내가 잘 되지 않는다.
적어도 자본주의에선.

Posted by tubebell

Chalk Outline

2019. 5. 29. 15:46

해석조차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이 단어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반적으로 시체 주변에
하얀 분필이나 스프레이로 테두리를 그린 선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제, 우리 집 앞에 저런 선이 그려졌다.
누군가 극단적 선택을 했던 것.
요즘엔 이런 슬픈 사고가 일어나도
집값 하락 등의 이유로 다들 쉬쉬하기에 바빠서
금방 묻혀 버리곤 한다.

그 선 역시 이틀이 지난 지금 희미해져 버렸고
누군가가 이 흔적조차 지우기 위해
청소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렇게 허망하게 묻힐 것을.
이렇게 금방 잊혀질 것을.
누군가에게 제대로 회자되지고 못하고
이렇게 슬프게 갈 것이었다면
뭐라도, 정말 뭐라도 해 보고 갈 것이지.

안타까웠다.
누군지 나이도 성별도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그가
그렇게 쉽게 사라졌다는 게 안타까웠고
그런 그가 그리 쉽게 잊혀진다는 것도 안타까웠다.

살자.
살아서 뭐라도 하자.
아깝다 너무.
당신의 고귀한 삶이.
꽃다운 인생이.
빛나는 순간들이.

Posted by tubebell




허5파6님의 ‘아이들은 자란다’ 도서 속
별책부록 같은 만화.

원 만화를 알면 더욱 눈물난다...

Posted by tubebell


검증되진 않았으나....
참고해 보려 한다. ㅋ

Posted by tubebell

1. 그날은 재수학원 대신 당구장에서 종일을 보내던 중이었다. 청문회가 한창이었지만 그 시절 그 신세의 그 또래에게, 5공의 의미는 쿠션 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건 순전히 우연이라 하는 게 옳겠다. 수구 앞에 섰더니 하필이면 티브이와 정면이었으니까. 사연은 그게 전부였으니까. 웬 새마을운동 읍네 지부장 같이 생긴 이가 눈에 들어 왔다. 그가 누군지 알 리 없어 무심하게 시선을 되돌리는 찰나, 익숙한 얼굴이 스쳤다. 다시 등을 폈다.

어, 정주영이네. 거물이다.
호, 재밌겠다. 타임을 외치고 티브이로 달렸다.

일해 성금의 강제성 여부를 묻는 질의에 “안 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 줬다 답함으로써 스스로를 군사정권의 일방적 피해자로 둔갑시키며 모두에게 공손히 ‘회장님’ 대접을 받고 있던 당대의 거물을, 그 촌뜨기만은 대차게 몰아세우고 있었다.
몇 놈이 터트리는 탄성. “와, 말 잘 한다.” 그러나 내게는 달변이 문제가 아니었다.

거대한 경제권력 앞에서 모두가 자세를 낮출 때, 그만은 정면으로 그 힘을 상대하고 있었다. 참으로, 씩씩했다. 그건 가르치거나 흉내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를 알았다.


2. 이후, 난 그를 두 번 만났다. 부산에서 또 실패한 직후인 2000년 봄, 백수가 된 그를 후줄근한 와룡동 사무실에서 만난 게 처음이었다. 낙선 사무실 특유의 적막감 속에 팔꿈치에 힘을 줄 때마다 들썩이는 싸구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다. 그때 오갔던 말들은 다 잊었다. 아무리 기를 써도 기억나는 건, 담배가 수북했던 모조 크리스털 재떨이, 인스턴트 커피의 밍밍한 맛, 그리고 한 문장뿐이다.

“역사 앞에서, 목숨을 던질 만하면 던질 수 있지요.”

앞뒤 이야기가 뭔지, 왜 그 말이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 말을 기억하는 건, 오로지 그의 웃음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누구나 저만의 레토릭이 있다. 난 그런 수사가 싫다. 같잖아서. 저 하나 제대로 건사해도 다행인 게 인간이다.
역사는 무슨. 주제넘게. 너나 잘하셔. 그런 속내. 그가 그때 적당히 결연한 표정만 지어줬어도, 그 말도 필시 잊고 말았을 게다. 정치인들은 그런 말을 웃으며 하지 않는 법이다. 비장한 자기연출의 타이밍이니까. 그런데 그는 웃으며 그 말을 했다.
그것도 촌뜨기처럼 씩씩하게.
참 희한하게도 그게 정치적 자아도취 따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진심으로 내게 전해진 건, 순전히 그 웃음 때문이었다.
난 그때 그렇게, 그에게 반했다.

두 번째 만남은 그 이듬해 충정로 해양수산부 장관실에서 대선후보 인터뷰로 이뤄졌다. 그 날 대화 역시 잊었다. 기억나는 건 이번엔 진짜 크리스털이었다는 거, 질문은 야박하게 했다는 거 - 그게 그에게 어울리는 대접이라 여겼다. 사심으로 물렁한 건 꼴불견이니까. 그런 건 그와 어울리지 않으니까 - 그리고 이 대목이다.

“시오니즘은 국수주의다. 인류공존에 방해가 되는 사고다.”

놀랐다. 그 생각이 아니라 그걸 말로 해버렸단 사실에. 정치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안전하지 않은 건 눙치고 간다. 그런데 그는 유불리를 따지지 않았다. 한편으론 그게 현실 정치인에게 득이 되는 것만은 아닌데 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통쾌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다. 이런 남자가 내 대통령이면 좋겠다고,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그 후 대통령으로 내린 판단 중 지지할 수 없는 결정들, 적지 않았으나 언제나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씩씩한 남자였다. 스스로에게 당당했고 같은 기준으로 세상을 상대했다. 난 그를 정치인이 아니라, 그렇게 한 사람의 남자로서, 진심으로 좋아했다.


3. 그래서 그의 투신을 받아들 수가 없었다. 가장 시답잖은 자들에게 가장 씩씩한 남자가 당하고 말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억울하건만, 투신이라니. 그게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아 종일 뉴스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담배 한 대를 찾았다는 대목에서 울컥 눈물이 났다. 에이 씨바… 왜 담배가 하필 그 순간에 없었어. 담배도 없이, 경호원도 없이,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혼자가 되어, 그렇게 가버렸다. 그 씩씩한 남자를 그렇게 마지막 예도 갖춰주지 못하고 혼자 보내버렸다는 게, 그게 너무 속이 상해 자꾸 눈물이 났다.

그러다 어느 신문이 그의 죽음을 사거라 한 대목을 읽다 웃음이 터졌다. 박정희의 죽음을 서거라 하고 그의 죽음을 사거라 했다. 푸하하. 눈물을 단 채, 웃었다. 그 믿기지 않을 정도의 졸렬함이라니. 그 옹졸함을 그렇게 자백하는 꼴이 가소로워 한참이나 웃었다. 맞다. 니들은 딱 그 정도였지. 그래 니들은 끝까지 그렇게 살다 뒤지겠지. 다행이다. 그리고 고맙다. 거리낌 없이 비웃을 수 있게 해줘서. 한참을 웃고서야 내가 지금 그 수준의 인간들이 주인 행세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뼛속 깊이 실감났다. 너무 후지다. 너무 후져 내가 이 시대에 속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4. 내가 예외가 없다 믿는 법칙은 단 하나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거. 그가 외롭게 던진 목숨은, 내게 어떻게든 되돌아올 것이다. 그게 축복이 될지 부채가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그만한 남자는, 내 생애 다시 없을 거라는 거.

이제 그를 보낸다.

잘 가요, 촌뜨기 노무현.

남은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PS - 사진 한 장 출력해 붙이고 작은 상 위에 담배 한 갑 올려놨다. 언제 한번 부엉이 바위에 올라 저 담뱃갑을 놓고 오련다.


Posted by tubebell

자주 가는 카페인 “신도림 커뮤니티”에서 퍼 왔다.
원 출처는 모르겠으나 직장인들에게 큰 도움이 될 듯.

손 마사지로 온 몸의 피로를 푸는 원리인 것 같다.

Posted by tubebell

나는 IT업계에 근무하는데 IT업은 분류상으로 ‘서비스업’에 속한다.
IT 기술을 서비스한다는 게 골자겠으나 실제로는 사람을 대상으로 서비스하는 경우도 흔하다.
직접 정보를 요청하는 경우도 많고 설명이나 회의는 부지기수고....

오늘 은행을 갈 일이 있었다.
전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온누리 상품권을 인당 50만원 한도 내에서 10% 할인 가격으로 구매 가능하다고 하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전통시장 등에서 이용하면 연말정산 때 도움도 더 된다길래 점심 때 근처 은행을 찾았다.

무슨 일로 왔냐고 친절히 물어봐 주길래 온누리 상품권을 사러 왔다 했다.
앉아서 기다리라 해서 한 10분을 기다렸다.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앞선 사람 업무가 무지 길어서 끝나질 않더라.

내 차례가 되었는데 신분증을 보여 달라 한다.
본인 인증이 되어야 인당 한도액을 팔 수 있다면서 말이다.
모바일로 신분증 보여드리면 안 되냐니까 복사를 해야 해서 안 된다고 한다.

기다린 것도 억울하고 그래서 한마디 했다.
처음에 말씀해 주시지 그랬냐고...
그랬더니 [옆 자리 앉은 행원이] 갑자기 그런다.

“처음에 신분증 없다고 미리 얘기하시지 그러셨어요?”

그 말이 웃는 얼굴로 한 말인데도 기분이 무척 나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은행에 가면서 신분증을 챙겨 가지 못한 내게 1차적인 문제가 있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일종의 ‘건의’ 차원에서도 얘기한 거였었다.
입구에 ‘상품권 구매시 신분증 지참하셔야 합니다’라거나
직원 교육시 그런 고객한테는 미리 확인을 해 준다거나....
그러면 서로간에 시간 손실과 오해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초기에 왜 내 직업과 직군을 썼냐 하면, 이 곳에서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IT업을 하는 사람들은 고객의 불만을 짜증나는 이벤트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일이 잦다.
아니, 상식적으로 어떻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지?
이런 것도 모르나? 하면서 속된 말로 뭐 밟았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들은 비 IT인이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고 그로 인해 무리한 요구를 할 수도 있는 거였었다.

그 이후로 나 역시 조심하고 업무에 임하는 편이다.
고객은 모를 수도 있다, 아니 모른다... 라면서...

내가 은행에 신분증도 없이 불쑥 찾아가 요구했으니 내 잘못이 더 크긴 하지만....
그 옆자리 행원(본인 고객도 아닌데 거들어서 더 기분이 나빴네요)이 보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빈말이라도 “직원들에게 전파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는 정도만 되었더라도 말이다.

진상 고객이 많은 시대다.
사업하는 입장에서도 마냥 손님이 왕이라 생각할 필요도 없고, 사업가도 때론 자신의 기분을 드러낼 수는 있는 거지만
가끔은 기본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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